송태규 시인·교육학박사
이미 100세 시대를 넘어 이제 120세 시대라고 말한다. 대신 건강한 몸과 마음이 따라 주는 삶이 행복의 근원이다. 누군가 ‘누죽걸산’이라는 신조어를 만들어냈다. 와사보생(臥死步生)과 같이 ‘누우면 죽고, 걸으면 산다’라는 의미란다. 서 있으면 앉고 싶고 앉으면 눕고 싶은 게 우리 욕심이라 제법 그럴싸한 말이라고 고개를 끄덕였다. 난 그 말을 ‘누죽달산’으로 바꾸어 부르기로 했다. 달릴 수 있어서 좋고 그 자체가 커다란 즐거움이니까.
요새 산악마라톤(트레일 레이스)에 푹 빠졌다. 눈을 크게 뜨면 일 년 내내 여기저기에서 끊이질 않는 대회에 참가할 수 있다. 지난봄에 이어 올해만 두 차례나 장수 산악마라톤 대회에 다녀왔다. 숲속을 달리는 기분은 일반 마라톤과는 또 다른 감흥을 준다. 신록이 우거진 봄, 잔뜩 골이 난 태양을 무성한 잎이 가려주는 여름, 억새가 허공을 빗질하는 가을, 순백의 미를 뽐내는 겨울. 숲은 어느 한 계절을 꼽으라면 나머지 셋이 눈을 흘길 만큼 다양한 매력을 뽐낸다.
장수는 호감이 넘치는 고장이다. 험한 산악 지역의 약점을 강점으로 활용한 여러 행사를 열고 있다. 지역의 빼어난 경관을 활용한 스포츠 이벤트는 지방 도시의 인구 감소 문제를 해결할 대안으로 떠오를 수 있다. 스포츠 관광과 마케팅이 지역과 상생하며 어떻게 선순환할 수 있는지 해답을 내놓는 모델이 될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지난 대회의 달콤함을 독차지하기에는 아까워 이번에는 아들을 꼬드겼다. 거의 매일 각자의 삶터에서 몸을 단련하고 사진으로 공유하며 운동량과 건강을 확인한다. 평지 달리기와 숲속을 달리는 것은 몸에서 사용하는 근육이 다르다. 대회를 앞두고 두어 차례 함께 산속을 누볐다. 아들과 함께 운동하면서 새삼 느끼는 게 많다. 내가 지친 기색이 보이면 아들은 슬그머니 내 등 뒤로 숨어 내가 흘린 발자국을 주워 담는다. 내 힘을 돋우려는 젊은이의 배려다. 패기만만했던 시절, 일이나 운동을 향한 열정이 용광로 쇳물처럼 식을 줄 몰랐다. 격세지감이지만 든든함을 감추기는 생선전에서 비린내 없애기만큼 쉽지 않다.
아들딸이 어릴 때부터 내가 참가하는 대회장에 데리고 다녔다. 초등학생이 되기도 전에 5km 마라톤을 시키고 훗날 아들은 철인3종과 마라톤 풀코스를 함께 완주했다. 이번 대회장에서 누군가 아들에게 말했다. 아버지 잘못 만나서 고생이 심하다고. 딴청 부리는 척하면서도 아들의 대답이 궁금해서 귀를 세웠다. “어릴 때는 억지로 따라다니느라 힘들었어요. 하지만 지금은 그렇게 키워주신 아버지가 감사해요. 이제 운동은 제게 빼놓을 수 없는 친구가 되었거든요.” 그 말을 들으면서 혼자 입꽃을 피웠다. 이번 대회에서 우리 부자는 도전 자체가 이미 승리자인 셈이다. 하지만 모든 도전이 동화처럼 마무리되지는 않는다. 우리의 박수가 여기서 그쳐서는 안 되는 이유다.
지난여름은 프라이팬처럼 달아올랐지만, 아들과 함께 대회를 준비하는 우리를 가로막지는 못했다. 그날 장수에서는 모든 날 것의 생동감이 펄떡였다. 아직은 설익었지만, 희끗희끗한 장안산의 억새는 러너들의 땀을 식히기에 충분했고 능선을 달릴 때 불어오는 바람은 지친 발걸음에 생기를 넣었다. 마지막 결승선에 다가설 때 몸엔 온통 소금꽃이 피었지만, 저만치서 나를 기다려 줄 아들 생각에 걸음은 겅중겅중 허공을 디뎠다.
장수 트레일 레이스는 코가 뻥 뚫리고 심장에 맺힌 땀까지 식혀주는 순도 120% 상쾌한 바람도 훈훈한 인심도 모두 공짜였다. 걷고 달릴 수 있어 좋으니 이게 행복이다. 다시 일상으로 돌아왔어도 장수의 바람, 빛깔, 온도, 소리, 인심이 자꾸만 떠오를 것 같다. <저작권자 ⓒ 전북금강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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