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정읍지역 여성 이인(異人)의 출현, ‘보기만 하면 낫는다’

전북금강일보 | 기사입력 2025/05/28 [15:59]
정읍역사문화연구소 이사장 김재영

[칼럼] 정읍지역 여성 이인(異人)의 출현, ‘보기만 하면 낫는다’

정읍역사문화연구소 이사장 김재영

전북금강일보 | 입력 : 2025/05/28 [15:59]

한국의 기성종교에서 여성들이 신도의 대다수를 차지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들이 종교적 지도자의 역할과 권위를 행사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고 봐도 무방하다. 

 

이런 점에 비추어 볼 때 정읍지역에 카리스마를 갖춘 여성 이인(異人)들의 출현이 유독 많았다고 하는 것은 특이한 현상이다. 

 

이 같은 원인이 무엇인지 아직도 나는 잘 모른다. 다만, 증산교와 상당 부분 연관이 있을 것으로 추정할 뿐이다. 

 

증산교조 강일순은 1908년 1월 입암면 대흥리에서 부인 고판례(高判禮)와 함께 ‘천지굿’이라는 큰 굿판을 열었다. 

 

강일순은 그 굿이 모든 여성들의 근원적인 해방을 상징하며, 후천이 개벽되는 가히 혁명적인 굿이라고 했다. 

 

그는 또 “앞으로는 네가 천지개벽의 주인이 될 것이다.”라고까지 했다. 

 

이로써 고판례는 그날 모든 여성의 으뜸이라는 뜻의 ‘수부(首婦)’라는 칭호를 얻게 되었다. 

 

이 같은 ‘여성주체의 후천개벽’ 선언은 동학농민혁명으로 일찍부터 평등사상을 경험했을 이 지역의 여성들에게 큰 영향을 끼쳤을 것이다. 

 

여기서는 정읍에서 개안(開眼)한 최영단(崔榮丹)이라는 한 여성이인의 행적에 대해 간단히 살펴보려고 한다. 

 

보기만 하면 낫는다는 ‘만병통치의 여인’이 바로 정읍의 최영단 여사다. 

 

1979년 초반부터 신문과 방송, 잡지에서 화제가 되었다. 최영단의 이 같은 치병행각이 불법 의료행위로 간주되어 그는 경찰서 유치장 신세를 두 번이나 진 일이 있었다. 1960년대 초반 전국에서 몰려든 인파가 매일 1,000여 명 씩 되었다. 이에 철도당국은 아예 간이역인 천원역까지 특별차량을 연결해 주었다. 

 

경찰은 미신조장의 우려가 있다 하여 1963년 3월 최영단을 ‘사기, 집회 및 시위에 관한 법률위반 혐의’로 구속했으나 공소유지가 안 돼 무혐의로 풀려났다. 

 

또 1979년 4월 16일 정읍경찰서는 ‘경범죄 처벌법 위반죄’로 최영단을 20일간 구류에 처한 일도 있었다.

 

최영단은 경북 군위군 우보면에서 할아버지 때부터 보천교를 신앙해 온 집안에서 태어났다. 

 

최영단이 세살 때 영천으로 이사를 갔는데 다섯 살 때부터 웬일인지 손가락이 모두 오그라들었다고 한다.

 

이를 지켜본 동리 사람들은 조막손이니, 병신손이니 하고 놀려대기 일쑤였다. 

 

그 무렵 어떤 할머니 한분이 나타나 영단의 손을 어루만져주자 하루에 한 개씩 새끼손가락부터 펴지기 시작해서 열흘 만에 열 손가락이 모두 펴졌다 한다. 

 

그 후 일곱 살 때 정읍으로 이사를 왔으나, 가난 때문에 다시 대구로 이사, 열 네 살의 어린 소녀의 몸으로 제사공장에 취직하여 생계를 돕다가 열일곱 살 때 한 팔이 없는 총각을 소개받아 결혼을 했다. 

 

그의 아들인 농초(聾樵) 박문기(朴文基)가 쓴 『본주(本主)』라는 책에 따르면, 최영단이 신기가 있게 된 것은 최영단의 나이 서른세 살 때의 일이라고 한다. 

 

어느 겨울날이었다. 아침 10시 쯤 혼자 방문 앞에 앉아 있는데 마당에 푸른 안개 같은 것이 끼고, 그 안개를 보료로 삼아 영단이 어릴 때 찾아오던 그 할머니가 앉아 있고, 거기에는 겨울인데도 무지개가 뻗어 있었다. 그러한 환상이 무려 4시간 동안 계속되었다 한다. 

 

그러던 어느 날 밤 남편 박씨가 꿈을 꾸었는데, 하늘의 선녀가 내려와 결혼을 하자고 하더라는 것이다. 

 

그런 후에 최영단의 집에 놀러와 국수와 고구마 찐 것을 나누어 먹은 동리사람들이 신통하게도 병이 나았다고 하는 사람이 늘어났다. 

 

자신의 환상과 남편의 이상한 꿈이 필시 자신이 무당이 될 팔자인가 싶어 무척 고민을 했다고 한다. 

 

최씨 가문에는 대대로 무당이 없었기 때문이다. 자신이 무당이 된다면 남편으로부터 버림받고 친척들로부터 사람 취급을 못 받을까 두려웠다고 한다. 

 

자신이 생각해 봐도 무당이 될 바에야 차라리 죽는 게 낫겠다는 생각을 여러 번 했지만 어린 자녀들의 얼굴을 보면 자살할 용기가 싹 가시곤 했다.

 

아무튼 최영단이 본격적으로 병을 고치기 시작한 것은 1961년도로 최영단의 집에서 물이나 음식을 얻어먹은 환자들이 우연치 않게 병이 나았다는 말을 퍼뜨리기 시작하자 그 소문이 원근 각지까지 퍼지게 된 것이다. 

 

신종교 연구자 고 탁명환(卓明煥)은 “최영단은 환자의 얼굴과 눈을 주시하면 그 환자의 통증이 자기 자신의 체내에 느껴지게 되어 환자의 아픈 곳을 알아냈다고 한다. 이렇게 환자와 심적 교통을 하면서 환자가 나을 수 있도록 위로를 하면 병이 곧 나았다고 한다. 생전에 이러한 현상을 본인도 의아해 했다”고 적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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