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초하러 고향 찾은 사람들, 마을잔치로 하나 되다

박형진 기자 | 기사입력 2026/08/31 [17:14]
장수 계북면 파곡마을 ‘파파실 사람들 벌초하는 날’… 꽃상여에 선대 이름 달고 마을 한 바퀴

출향인·주민 한자리서 덕담과 노래 나눠… 소멸위기 농촌에 공동체 회복의 새로운 모델 기대

벌초하러 고향 찾은 사람들, 마을잔치로 하나 되다

장수 계북면 파곡마을 ‘파파실 사람들 벌초하는 날’… 꽃상여에 선대 이름 달고 마을 한 바퀴

출향인·주민 한자리서 덕담과 노래 나눠… 소멸위기 농촌에 공동체 회복의 새로운 모델 기대

박형진 기자 | 입력 : 2026/08/31 [17:14]

 

지난 8월 29일, 장수군 계북면 파곡마을(이장 박순복)에 반가운 사람들이 하나둘 모여들었다. 전국 각지에서 살아가는 출향인들이 조상의 산소를 벌초하기 위해 고향을 찾은 것이다. 벌초를 마친 사람들은 다시 마을 한가운데로 모였다. 오랜만에 만난 얼굴과 안부를 나누고 음식을 함께 먹으며 한바탕 마을잔치를 벌였다.

 

파곡마을에서는 이날 제3회 ‘파파실 사람들 벌초하는 날’ 마을축제(제전위원장 전일우)가 열렸다.

 

‘파파실’은 파곡마을의 옛 이름이다. 주민들은 사라져가는 옛 지명을 되살리고 고향을 떠난 사람들과 마을을 지키는 주민들을 하나로 잇기 위해 축제 이름에 ‘파파실’을 넣었다.

 

이 축제의 출발점은 ‘벌초’다. 파곡마을에서 태어나고 자랐지만, 생업과 자녀 교육 등을 위해 서울과 수도권을 비롯한 전국 각지로 떠난 출향인들은 오래전부터 8월 마지막 주 토요일을 벌초하는 날로 정해 고향을 찾았다.

 

 

산과 들에 흩어진 조상의 묘를 찾아 풀을 베고 묘역을 정돈한 뒤에는 자연스럽게 마을에 모였다. 어릴 적 함께 뛰놀던 친구를 만나고, 선후배와 이웃의 안부를 물으며 음식을 나눴다. 해마다 반복되던 이 만남을 단순한 벌초 모임에 그치지 않고 마을의 역사와 사람을 기억하는 축제로 만들어보자는 뜻이 모이면서 ‘파파실 사람들 벌초하는 날’이 탄생했다.

 

올해로 3회째를 맞은 축제는 ‘파파실의 과거·현재·미래’를 주제로 마련됐다. 상여놀이를 시작으로 기념식과 출향인들의 릴레이 덕담, ‘파파실 전국노래자랑’ 등이 이어졌다.

 

 

이 가운데 가장 눈길을 끈 행사는 단연 ‘상여놀이’였다.

 

주민들은 파곡마을에서 태어나거나 이곳에서 오랫동안 살다가 세상을 떠난 사람들의 이름을 노란 리본에 하나하나 적었다. 그렇게 만들어진 수많은 이름표를 꽃상여에 매달았다. 꽃상여에는 이름만 남은 것이 아니었다. 한때 이 마을의 논밭을 일구고, 자식을 키우며, 이웃과 울고 웃었던 선대의 삶과 기억이 함께 실렸다.

 

꽃상여가 마을 길을 따라 움직이자, 주민과 출향인들이 그 뒤를 따랐다. 상여는 약 1시간 30분에 걸쳐 고인들이 생전에 살았던 동네를 천천히 한 바퀴 돌았다.

 

“이 집에도 저 어른이 사셨지.”

 

상여가 골목을 지날 때마다 사람들은 먼저 세상을 떠난 부모와 형제, 이웃을 떠올렸다. 자신의 집 앞에 상여가 도착하면 주민들은 작은 노잣돈을 걸었다. 먼저 떠난 이들의 평안을 빌고 조상을 추모하는 마음을 담은 것이다.

 

그래서 파파실의 상여 놀이는 단순히 옛 장례문화를 재현하는 민속놀이에 머물지 않는다. 지금의 마을을 있게 한 사람들의 이름을 다시 불러보고 그들의 삶을 기억하는 파곡마을만의 독특한 추모 의식이자 공동체 행사로 자리 잡고 있다.

 

상여 놀이가 끝난 뒤에는 주민과 출향인이 한자리에 모인 가운데 기념식이 열렸다. 일반적인 행사처럼 내빈 중심의 딱딱한 의전보다는 오랜만에 고향을 찾은 사람과 마을 주민들이 서로 얼굴을 확인하고 안부를 나누는 데 의미를 뒀다.

 

전일우 제전위원장과 박순복 이장의 환영사에 이어 이날 참석한 출향인들을 한 사람 한 사람 소개했다. 이어 마이크를 잡고 싶은 사람은 누구나 앞으로 나와 고향 사람들에게 덕담을 건넸다.

 

어떤 이는 어린 시절의 추억을 이야기했고, 어떤 이는 고향을 지켜주는 주민들에게 고마움을 전했다. 오랜만에 만난 친구와 선후배의 건강을 기원하는 목소리도 이어졌다.

 

전일우 제전위원장은 “해가 거듭될수록 돌아가시는 분들이 계시고, 몸이 불편해 참석하지 못하는 분들도 늘어나 안타깝다”며 “모두 건강을 잘 챙겨 오래오래 고향을 찾아 이 자리에 함께해 주셨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박순복 이장은 마을 축제가 주민들의 관계에도 적지 않은 변화를 가져왔다고 설명했다.

 

박 이장은 “축제를 열기 전에는 같은 마을에 살면서도 각자의 일에 바빠 얼굴을 마주할 기회가 많지 않았다”며 “축제를 준비하고 함께 즐기는 과정을 거치면서 주민들이 한 식구라는 마음이 커졌고 단합과 친목도 더욱 두터워졌다”고 말했다.

 

어둠이 짙어지면서 축제는 더욱 흥겨워졌다. 무대에서는 ‘파파실 전국노래자랑’이 펼쳐졌다. 거창한 전국대회가 아니라 전국 곳곳에 흩어져 살다가 이날 고향을 찾아온 출향인들이 참가한다는 의미에서 붙여진 이름이다.

 

서울과 수도권을 비롯해 전국 각지에서 온 출향인과 지금도 파파실을 지키며 살아가는 주민들이 차례로 무대에 올랐다. 노래를 잘하고 못하는 것은 중요하지 않았다. 누군가 노래를 시작하면 객석에서는 박수가 터졌고, 흥겨운 가락이 나오면 자리에서 일어나 어깨춤을 추는 사람들도 생겨났다.

 

마을 사람들이 정성껏 마련한 음식도 빠질 수 없었다. 주민과 출향인들은 한 상에 둘러앉아 음식을 나누고 술잔을 기울였다. 어린 시절 이야기부터 객지에서 살아온 이야기, 마을의 옛 모습과 달라진 고향 풍경까지 이야기꽃이 이어졌다. 그렇게 파파실의 밤은 깊어갔다.

 

축제 전체를 기획하고 연출한 장성열 감독은 ‘파파실 사람들 벌초하는 날’이 단순한 하루 행사를 넘어 농촌 공동체가 다시 사람을 이어주는 계기가 되기를 바랐다.

 

장 감독은 “파곡마을뿐만 아니라 장수군의 모든 마을이 저마다의 역사와 문화, 특색을 살린 다양한 방식의 마을축제를 만들어 갔으면 좋겠다”며 “고령화와 인구 감소로 소멸 위기에 놓인 농촌에서 사람들이 공동체 속의 고독에서 벗어나 서로 의지하고 따뜻한 삶을 살아가는 여유를 가졌으면 한다”고 말했다.

 

우리 농촌은 갈수록 사람이 줄고 있다. 젊은이들이 떠난 자리에는 고령의 주민들이 남았고, 한때 아이들의 웃음소리로 가득했던 골목도 점차 조용해지고 있다. 이런 현실에서 파곡마을의 축제는 규모가 크거나 화려하지 않아도 마을 축제가 어떤 역할을 할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파곡마을 사람들은 새로운 축제의 소재를 밖에서 찾지 않았다. 해마다 해오던 ‘벌초’에서 답을 찾았다. 조상을 찾아오는 날을 고향 사람을 만나는 날로 만들고, 먼저 세상을 떠난 주민들의 이름을 꽃상여에 달아 기억했다. 여기에 덕담과 음식, 노래를 더해 세대와 지역을 넘어 사람과 사람을 이어주는 마을 축제로 발전시켰다.

 

선대를 기억하는 꽃상여가 지나간 길 위에서 오늘을 살아가는 주민과 출향인들이 다시 손을 잡았다.

 

‘파파실 사람들 벌초하는 날’은 그렇게 과거의 사람을 기억하고, 현재의 사람들이 정을 나누며, 고향을 떠난 다음 세대까지 다시 파파실로 불러들이는 작은 약속이 되고 있다.

 

해마다 8월 마지막 주 토요일이면 다시 고향으로 돌아오는 사람들. 그들이 있어 파파실은 아직 살아 있는 마을이다.

 

/박형지 기자 hjpak1714@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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